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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힐스cc 순천 1박2일 골프투어 겨울에도 라운드

대원투어! 2025. 1. 13. 00:47

따뜻한 남도에서 파인힐스cc 순천 1박2일 골프투어 / 1월 특가 예약안내

새해가 왔습니다. 이렇게 한 해를 떠나보내면서 아쉬움도 있었는데요. 그런 걸 보면 시간은 참 빨리도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이 더위가 언제쯤 가실까 생각한 것 같은데 이제는 이 추위가 언제쯤 가실까 생각하며 벌써부터 따뜻한 봄을 기다리게 됩니다.



또 날씨가 많이 추워진 만큼 어깨를 움츠리게 되는데요. 이렇게 날씨가 추운데 무슨 골프냐는 생각을 하실 수 있지만 오늘은 한 겨울에도 따뜻한 남도의 파인힐스cc 순천 1박2일 골프투어에 대해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날씨가 추워서 골프가 비수가인데요. 이러한 겨울에도 골프가 가능한 곳에는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 위치한 골프장이 있는데, 겨울 특가 요금으로 골프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한답니다.



파인힐스cc 순천 1박2일 골프투어

순천 파인힐스CC



매년 진행하는 소비자가 만족하는 골프장 순위에서 10위 안에 무려 4년 연속으로 선정되었는데요.




클럽하우스에서 바라본 골프장뷰를 보면 하늘이 맑고 파랗습니다. 탁트인 뷰가 마음도 맑아지게 만드는데요. 이러한 파인힐스cc 순천 1박2일 골프투어는 첫 날에는 18홀, 둘째 날에는 18홀을 이용하실 수 있고 파인힐스 골프텔에서 숙박을 이용한 다음 조식까지 이용하시는 조건이랍니다.



1월에는 단부제 운영이라 2일차에도 아침일찍 타임이 아니고 9시~10 정도에 배정되는데요. 그래서 여유롭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파인힐스CC는 파인, 레이크, 힐스  각 9홀씩 27홀 골프장인데요.



파인힐스cc 순천 1박2일 골프투어

파인코스

사계절 내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송림, 암반 등 천혜의 자연환경과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코스입니다. 각 홀마다 정확한 샷을 해야하는 만큼 인내심과 끈기로 한계에 도전하는 남성적인 느낌의  코스입니다.



파인힐스cc 순천 1박2일 골프투어

레이크코스

언듈레이션이 있는 이국적인 레이크의 신비로움이 조화된 아름다운 코스인데요. 대담한 샷과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순응해야 정복할수 있습니다. 골퍼의 실력을 엄격히 적용하는 섬세하고 여성적인 코스입니다.



파인힐스cc 순천 1박2일 골프투어

힐스코스

토성칠교의 전설과 함께 고향의 정취와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 그린 공략을 위해서는 정확한 샷이 요구되는데요. 다소 심한 언듈레이션과 도처의 장애물이 치밀한 계산에 의한 전략적인 공략을 요구하는 다이나믹한 코스랍니다.



파인힐스cc 순천 1박2일 골프투어

파인힐스 골프텔




클럽하우스 옆에 있는데요.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의 능선과 골프코스의 전경을 배경으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속에서 즐기는 호텔급 골프텔이랍니다.




이처럼 소비자가 만족한 골프장 10위 안에 연속으로 4회 선정된 파인힐스CC로 오셔서 그만큼 잘 관리된 페어웨이와 그린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송광사는



우리나라의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사찰로서 유서깊은 절입니다. 《송광사지》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혜린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이라 하였는데요.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에 이렇게 창건된 뒤 고려 인종 3년(1125)에 석조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1197년(명종 27) 승려 수우가 사우 건설을 시작하였습니다. 3년이 지난 뒤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사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라 칭하고, 도와 선을 닦기 시작하면, 대찰로 중건하였습니다.



이 사찰을 안고 있는 조계산은 이때까지 송광산이라 불렸는데요. 보조국사 이후 조계종의 중흥도량이 되면서부터 조계산이라고 고쳐 불렸습니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의 총칭인데요. 고려 숙종 2년(1097) 대각국사 의천이 일으킨  천태종과 구별해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습니다.